김광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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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광현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162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 등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 종사관으로 활약하고, 사친추숭에 반대하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했으며, 이후 청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등 절개를 지켰다.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사건과 연루되어 사위가 좌천되기도 했으며, 청주목사,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글씨에 능했으며, 《수북유고》 등의 저술을 남겼다.
김광현은 1625년(인조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 정묘호란 때는 이조판서의 종사관으로 활약했고, 인조의 사친 추숭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기도 했다.[2][3][4] 1635년 천재지변으로 사면받아 풀려났다.
김광현은 글씨에 능했는데, 주로 전서, 해서를 잘 썼다. 작품으로는 《홍양청난비》, 《민기신도비》, 《영상이탁묘비》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수북유고》가 있다.
2. 생애
1637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강화도 함락으로 아버지 김상용이 순절하였다.[5] 호종의 공으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청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는 서명하지 않는 절개를 보였다.
이후 청주목사를 거쳐 이조참판으로 복귀했으나, 소현세자 독살 사건과 강빈 옥사에 연루되어 사위 강문명(姜文明)이 좌천되고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6] 김광현은 글씨에도 능하여 전서와 해서를 잘 썼으며, 《홍양청난비》, 《민기신도비》, 《영상이탁묘비》 등의 작품을 남겼다. 문집으로는 《수북유고》가 전해진다.
2. 1. 초기 관직 생활
162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1], 홍문관 정자(正字)와 수찬 등을 지냈다. 1627년 후금의 침략으로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이조판서 심열(沈悅)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었다.
2. 2. 정묘호란과 사친추숭 논란
1627년 후금의 침략으로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이조판서 심열(沈悅)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었다.[1] 1634년, 인조가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는 사친추숭(私親追崇)을 추진하려 하자, 부제학이었던 김광현은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의 주장을 비판하고 탄핵하였다.[2] 이로 인해 인조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삭탈관직 당하고[3]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4] 1635년 천재지변이 발생하자 특별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2. 3.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1637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상헌, 김광찬 등과 함께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아버지 김상용이 분신자결하였다.[5] 그 뒤 복상으로 충청도 홍주에 내려갔으며, 호종(扈從)의 공으로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이후 청나라 연호가 적힌 각종 공문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2. 4.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사건
1645년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이어 1646년 민회빈 강씨가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아 강빈옥사가 발생하여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김광현의 사위인 강문명(姜文明)은 민회빈 강씨의 친오빠였기에 이조참판에서 순천부사로 좌천되었으며, 1647년 순천에서 울분 끝에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6]
2. 5. 말년과 평가
1637년 병자호란 때 김상헌, 김광찬 등과 함께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갔다. 이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아버지 김상용이 분신자결하였다.[5] 그 뒤 복상으로 충청도 홍주에 내려갔으며, 호종(扈從)의 공으로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이후 각종 공문서에 청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뒤에 청주목사로 부임했으며, 승진하여 이조참판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소현세자 독살사건과, 이어 민회빈 강씨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으로 강빈옥사가 발생, 1646년 민회빈 강씨는 사사되고 세 아들은 귀양갔다. 이때 그의 사위인 강문명(姜文明)은 민회빈 강씨의 친오빠인 관계로 이조참판에서 순천부사로 좌천되었으며, 1647년 순천에서 울분 끝에 63세로 세상을 떠났다.[6]
글씨에 능하였는데 주로 전서·해서를 잘 썼다. 작품으로는 《홍양청난비》(洪陽淸難碑),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 《영상이탁묘비》(領相李鐸墓碑) 등이 있다. 문집으로는 《수북유고》가 있다.
3. 작품 및 저술
3. 1. 글씨
김광현은 글씨에 능했는데, 주로 전서(篆書)·해서(楷書)를 잘 썼다. 작품으로는 《홍양청난비》(洪陽淸難碑),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 《영상이탁묘비》(領相李鐸墓碑) 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수북유고》가 있다.
3. 2. 작품
김광현은 글씨에 능하였으며, 주로 전서·해서를 잘 썼다. 그의 작품으로는 《홍양청난비》(洪陽淸難碑),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 《영상이탁묘비》(領相李鐸墓碑) 등이 있다.[6] 문집으로는 《수북유고》가 전해진다.
3. 3. 저술
김광현은 글씨에 능했으며, 주로 전서·해서를 잘 썼다. 문집으로는 《수북유고》가 있다. 작품으로는 《홍양청난비》(洪陽淸難碑),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 《영상이탁묘비》(領相李鐸墓碑) 등이 있다.[6]
참조
[1]
웹인용
김광현 문과 급제 기록
https://web.archive.[...]
2012-07-08
[2]
역사기록
인조실록 12년(1634 갑술 / 명 숭정(崇禎) 7년) 윤8월 11일(갑오) 2번째기사
1634
[3]
역사기록
인조실록 12년(1634 갑술 / 명 숭정(崇禎) 7년) 윤8월 13일(병신) 1번째기사
1634
[4]
역사기록
인조실록 12년(1634 갑술 / 명 숭정(崇禎) 7년) 윤8월 14일(정유) 1번째기사
1634
[5]
역사기록
김상용의 죽음에 대해 그가 순절한 것이 아니라 종에게 자기 옷을 입히고 숨어 있던 중에 담배를 피우다가 화약에 불이 붙어 폭사한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했다.-인조실록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0월 28일(임술) 5번째기사
1637
[6]
역사기록
인조실록 25년(1647 정해 / 청 순치(順治) 4년) 7월 17일(병진) 3번째기사
1647
[7]
참고문헌
선원록 참고
[8]
가계
정종(定宗)의 14남 정석군(貞石君)의 고손녀 ----정석군 → 이겸 → 원주 원씨|원계채의 처 이씨 → 원대은개 → 정말정
[9]
정보
효종 (조선)|효종 비 인선왕후의 모친
[10]
정보
이명 김광추(金光秌)
[11]
정보
조창원의 아들이자 인조 (조선)|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오빠
[12]
정보
서진리(徐晉履)의 장남으로 정신옹주 (선조)|정신옹주의 손자
[13]
정보
강석기의 차남이자 민회빈 강씨의 오빠
[14]
정보
정씨 소생인지 이씨 소생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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